책이나 영화에서 죽음을 겪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나는 약 4번 정도 죽음의 경우를 맞보았다. 대부분이 물이었고, 약에 의한 경험도 있었다. 그렇지만 살아있다. 오늘 운전을 하며 죽음이란 경험이 나에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 내가 소중하다고 가치있다고 여겼던 대부분의 것들이 가치가 없어졌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아니고, 뭐랄까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죽을려고 한 경우와 의도치 않게 죽음을 겪었을 경우가 다르다. 우선 나의 경우 의도치 않게 죽음을 겪은 경우에 이런 전환점이 발생되었다.

의도한 경우라면 죽고 싶었는데 살아났으니 더 불만스러워지고, 위인들처럼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더란 말이다. 그래서 회의적인 비관적인 마음은 지속적으로 이어져갔다.

의도치 않은 경우의 죽음은 앞서 말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사람이 툭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글로 쓴 것보다 훨씬 약한게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기도 하고,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으니, 맛있는 것을 먼저 먹고 맛없는 것을 나중에 먹는 것처럼 중요한 것을 먼저 끝내놓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죽음을 원했던 사람이 살아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가능성이 큰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고통이 또다시 이어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원치않는 죽음을 경험해볼 수도 없다. 아까 말했듯이 툭하면 죽을수도 있으니 말이다.

배수의 진을 치고 도전하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공감을 하고 그런 식으로 도전을 했다. 그런 도전을 몇번이나 하고 난 뒤에 나는 깨달았다. 그 말이 틀린 말임을.

위의 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야 한다.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판단력은 사라질 것이며 위험을 경계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죽을 것 긴장을 풀고 맞서 싸우라는 의미이겠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강해질까?

오히려 정반대다. 아이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아이를 살리겠다는 엄마의 용기, 혹은 그 옛날 몰래 카메라에서 버스에 갇힌 채 납치당하는 느낌을 받고 승객이 버스 손잡이를 뽑았던 그 사건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죽고 싶지 않을 때, 말하자면 살고 싶을 때, 강한 힘이 튀어나온다. 날 죽여라 할 때, 힘은 약해진다.

전에도 말했지만, 살고 싶을 때, 몸에서 알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한다. 살고자하는 힘이 엄청나게 강하게 나온다. 오죽했으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뒤로 가서 목을 잡고 구조하란 말이 있지 않은가?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무기력한 나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생각해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만의 느낌이다. 분노를 해야 한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매일매일이 같은 나날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