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

임시초안

시간이란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많다.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시간은 사물의 변화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변화를 구간별로 세밀하게 나눈 것이 시간이다.

헌데…지금 우리는 시간에 맞춰 변화를 계획하고 모색한다.

이런 얘기도 있을 것이다. 쟤는 얼굴이 계속 그대로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즉 우리가 멈춰있을 땐,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변화했을 때 시간이 흐른다. 변화없이 가만히 있는다면, 그대는 과거에 머문다. 변화를 했다면, 성장을 했고, 따라서 시간도 흐르게 된다.

나를 찾는다는 것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욕망 생각 목표들은 타인의 것들이다.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물이 된다 해도, 곧 그는 그 물을 또 어떤 형태에 채워넣으려 한다.

물은 그릇에 담는다면 그 성질을 잃는다. 물은 그대로 자연에 법칙에 따라 흐르도록 놔둬야 한다. 흐른다는 것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때만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어떤 형태로 생각한다면, 곧 본성을 잃게 된다. 그대로 놔두되, 고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나 자신이 되는 길이다.

독서에 관해서

속독, 다독이니 독서의 방법에 관한 것들이 태어난다. 마치 한 부모에서 서로 다른 자식이 태어나듯이.

진정한 독서는 배우기 위해 도움을 청하기 위해 굽신거리며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저자의 지식에 대해 통렬히 비하하며 자신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와 친구가 되고 대화하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순 없지만, 그 친구의 이야기가 듣고 싶고, 어린 아이가 자기전에 부모님이 읽어주시는 동화를 들으며 잠자고 싶은 것처럼 너무나 오래동안 기다려왔던 그 이야기들처럼. 그렇게 되었을 때, 마치 여인을 사랑할 때처럼 다른 지식들이 전부 그 유용성을 잃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독서가 되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조금 과장을 한다면, 우리는 원하는 목표를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단 하나의 조건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오늘 운전하다가 아주 구형 BMW 차량을 발견했다. 그 차는 과거에 가장 멋진 차였음은 분명하다. 욕망은 상대적이다. BMW가 최고의 차량이었으니 그 차를 샀을 거란 말이다. 더 상위차가 있으면 그 차를 샀을 것이다.

우리의 욕망도 상대적이다. 가장 부자가 50평 집에 산다면 그보다 적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가정은 그보다 작은 집을 구매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내 욕망을 안다면 무엇이든 달성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남의 목표가 아닌 내 목표를 말이다. 남들이 100억을 번다니까 나는 200억을 벌겠다고 하는 것이 사람이다. 상대적인 욕망 때문에 그렇다. 만일 그런 것이 없이 정말 내 필요한 금액을 목표로 삼는다면 얼마일까?

따라서 나는 내 목표일 경우에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말이다.

성공을 따라할 수 없는 이유

성공은 구불구불하게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똑같이 오랜 시간동안 고생을 하며 따라가기 싫기 때문에 최단코스로 이해해버리고, 그렇게 가려고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했다. 그 이유인즉슨

구불구불하게 가서 어떤 도착점이 아닌 결과물을 낳았다고 표현한다면, 그렇게 똑같이 구불구불하게 가지 않으면 그 결과물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최단코스로 간다면 같은 결과물은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도자기에 비유를 한다면 적당한 흙을 선정하여 적당한 비율로 재료물을 섞어야 적당한 비율이 나올 것이며, 빚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적당한 회전수를 찾아서 손의 움직임을 연습해야만 할 것이다.

이 과정을 모두 지나치고 준비된 흙으로 빚기만 한다면 왜 그 결과물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